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바타 카츠이에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기노시타 히데요시]]가 중용될 때 기존 가신들에게 찍힐까봐 아부하기 위해 고참들의 성에서 한자씩 따서 성을 바꾼 것이 '하시바'이며, '하([[羽]])'는 [[니와 나가히데]]에서, 시바([[柴]])는 시바타의 성에서 따왔다. 본래 노부나가의 동생인 노부유키 파에 서서 활약했다. 그러나 노부유키가 한 번 패하고 노부나가에게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모반을 꾀하자 차마 그 꼴을 못본 카츠이에는 노부유키의 모반을 밀고했고 노부나가에게 붙어 이후 죽을 때까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하였다. 오다 가문 최강의 [[맹장]]으로 용명을 떨쳤으며 그래서 붙은 별명이 '''[[오니]] 시바타([[鬼]]柴[[田]])''', '''돌격 시바타(かかれ[* かかれ(가카레)는 전국 시대 관련 매체에서 주로 대장급 무장들이 많이 외치는 말로 "덤벼라!" "돌격하라!" 정도의 뜻이다. 동사 かかる는 흔히 '걸리다'라는 뜻으로 제일 많이 쓰이지만 일어사전을 찾아보면 '덤벼들다, 공격하다'의 뜻으로도 쓰인다.]柴田)'''. 그의 통솔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[[비와호]] 동남에 위치한 쵸우코지성에 가츠이에의 군세가 [[롯카쿠 요시카타]]의 맹공으로 성에 틀어박힌 채 고립되었는데 거기에 물과 식량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. 그러자 가츠이에는 큰 항아리에 성에 남은 물을 모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사발씩 먹이고 자신의 창으로 항아리를 깨면서 "이제 성에 남은 물이 없으니 죽기로 싸우는 일만 남았다"며 병사들을 고무시켰다. 파부침주([[破]][[釜]][[沈]][[舟]])와 비슷한 효과. 결국 그와 그 병사들은 죽기로 싸워 적의 포위망을 돌파, 성에서 탈출하여 퇴각하는 데 성공한다. 이 일화로 '''독깨기 시바타([[瓶]][[割]]り柴田)'''라는 이명도 얻었다. 항상 여러 방면에 적을 두고 싸웠던 오다 가문의 일개 방면군을 맡아 활약했으며 [[니와 나가히데]], [[아케치 미츠히데]], [[하시바 히데요시]], [[타키가와 카즈마스]] 등 중신 중에서도 필두 가로에 속하는 인물로, [[에치젠]]의 [[아사쿠라 요시카게]]를 격파한 후 노부나가는 가츠이에에게 에치젠을 맡기고 나아가 [[호쿠리쿠]](北陸) 방면 공략을 담당하게 했다. 한때는 테도리가와에서 [[우에스기 겐신]]에게 대패[* 히데요시가 멋대로 전선을 이탈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나, 가장 큰 원인은 도하 직후 테도리카와가 범람하여 퇴로가 차단되고 전군이 분단된 상태에서 우에스기 군의 급습을 받아 각개격파 당했기 때문. 이 때문에 일각에선 우에스기 군이나 그와 연합한 세력이 오다 군에게 수공을 건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.]하여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겐신의 급사로 위기에서 벗어났다. 노부나가의 원군은 강 건너에서 도와주지 못하고 지켜만 보다, 간신히 빠져나온 시바타만 데리고 후퇴한다.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급습으로 패사했을 즈음에는 엣츄 방면에서 겐신 사후의 우에스기 가문 공략 중 이었고 이와중에 우에스기 측의 우오즈성을 함락 시켰다. 당시 장자였던 [[오다 노부타다|노부타다]] 역시 니죠 성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순서대로라면 시바타가 권력을 쥐었어야 할 것이었으나, 북방에서 어물거리는 사이에 히데요시가 당시 적대하던 모리와 재빨리 화평하고 돌아와 아케치 미츠히데를 격파하며 부상하기 시작한다. 그렇다 해도 여전히 히데요시보다는 카츠이에가 훨씬 유력한 후계자로 받아들여졌으나, [[키요스 회의]]에서 결정적으로 주도권을 뺏기게 된다. 대립을 거듭한 끝에 이후 히데요시와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도 [[기동전]]에서 앞선 히데요시 군에 패배하여 자살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